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Date: 5-3-18 욥기41-42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

  • 작성자 사진: 주인
    주인
  • 2018년 5월 3일
  • 2분 분량

One Verse: 욥42:5-6절, "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<회개>하나이다"



하나님의 대답(욥38-42장): 여호와에 대한 욥의 마지막 대답


<회개>는 돌이킴이다. 욥은 자기 죄를 고백함과 동시에 굳센 믿음을 향해 자기 자신과 또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모든 것을 이제 <하나님의 손>에 맡긴다.

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완전히 충족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[얼마나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느냐]라는 우리 편의 <믿음의 능력>에 달려 있다.


왜냐하면 베드로전서 5:6-7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붙들고 있는 <염려> 그 자체가 바로 [교만]의 한 형태라고 지적한다. 베드로전서 5:6-7절, 6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

7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


6절과 7절의 두 절 사이의 문법적 관계를 보면 7절은 평서문의 새로운 문장이 아니라 6절의 종속절이다. 다시 말해서 “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김[으로써] 겸손하라”라는 의미로 간단히 정리해 볼 수 있다.

겸손하게 되는 한 가지 방법이 오직 하나님께 모든 <염려>를 맡기는 것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. 즉, 당신의 <염려>를 주게 맡기는 것이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우리가 <겸손>하게 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. 반대로 과도한 걱정과 염려가 오히려 겸손하지 못하게 만드는 <교만>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.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.


그러면 우리의 <염려>를 주께 맡기는 것이 왜 <교만>의 반대가 되는 <겸손>이 되는 것일까요?

왜냐하면 <교만>은 <염려>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다. <교만>은 비록 염려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, 그 해결책이 <자신>보다 더 지혜롭고 더 강한 <어떤 존재>를 신뢰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여전히 싫어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라는 의미에서다. 그렇기 때문에 불신앙의 한 형태는 <교만>이며, 이 교만은 하나님의 미래의 은혜를 신뢰하기 싫어하는 마음인 것이다.


적용: So What~! 하나님은 누구이신가?

<믿음>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생긴다. 그러나 <교만>은 그렇지 않다.

<믿음>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의지하지만, <교만>은 그렇지 않다.

<믿음>은 <염려>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고, 그렇지 않는 것이 <교만>이다.


그러므로 [교만의 불신앙]과 싸우는 방법은 <염려>가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고, “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보신다”는 미래의 은혜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믿고, 그것을 마음을 품는 것이다.


<자기 의존>에 기울어져 있는 것이 교만이며, 자신을 의지하는 대신 <하나님>을 의지해야 한다.

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에 <자기 의존>에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 교만이다.

“하나님께서 당신을 돌보신다”는 은혜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믿고 마음에 품어야 한다.


*새벽기도 설교 내용 중에 요약해서 보냅니다.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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© 2018 by Sangin Han. " Freely you have received, freely give.​ 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"(마10:8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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